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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항일의병장 순국106년 만에 건국훈장 받았다

기사입력 2014.08.20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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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뉴스]=구한말 을사늑약(1905년) 이후 국내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이다 순국한 문경출신 김성달 의병장 등 28명이 한 향토사학자의 노력으로 순국 106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20일 경남 하동문화원 정재상 향토사연구위원장은 “지난 2월 토지주택 박물관과 국가기록원에서 항일의병장 등 259명의 문건을 찾아 의병장 41명의 공적서를 만들어 정부에 서훈을 신청했는데 이중 28명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훈장을 추서 받았다”고 밝혔다.

    이번에 정위원장의 노력으로 건국훈장을 추서 받은 항일의병장 28명은 경북 5명 경남 12명, 전남 6명, 전북 3명, 강원도출신 2명이다.

    이들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1907~1909년 사이, 50~400여명의 의병대를 조직하여 전라도와 경상도 강원도 일대인 지리산 가야산 태백산맥에서 일제에 맞서 항일투쟁을 벌이다 일제의 ‘남한 대 토벌작전’때 체포되어 학살 당하거나 전사 순국했다.

    한편 이번 문건을 찾아 서훈을 신청했던 정재상 위원장은 “항일의병들은 온몸으로 일제에 저항하며 목숨을 바친분이다”며 “이번 훈장추서는 항일투사들의 민족애와 나라사랑 정신의 숭고한 뜻을 다시 한번 생각 하게한다”고 밝혔다. 정위원장은 “정부는 목숨 바친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보훈사업을 펼쳐야한다”고 덧붙혔다.

     

     

    15일 건국훈장을 추서 받은 항일의병장의 공적요지는 다음과 같다.

    <문경>

    ▲김성달(金聖達·27세, 1880~1907 9·경북 문경군 신동면 노목)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북 일원에서 의병 6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7년 9월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다 체포된 후 발각되어 총살됐다

    .<구미(화안)>

    ▲김용출(金用出·25세, 1882~1907 9·경북 구미(화안)군 달미면 광동리)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 초부터 경상북도 일원에서 60여명의 의군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이며 많은 전과를 올렸다.그러던 중 1907년 9월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다 체포돼 총살됐다.

    <영천>

    ▲김직현(金直玄·32세, 1875~1907 12 14·경북 영천시 자양면 용화리)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경주출신의 이모(李某) 의병장과 함께 1907년 초부터 영천, 청송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7년 12월14일 영천군 신촌면 하란동(新村面 下蘭洞) 부근에서 군수물자를 수송하던 중 일본군과 조우 격전을 벌이다 총상을 입고 체포 된 후 순국했다.

    <고령>

    ▲박인시(朴仁是~1908 8 26·경북 고령군 명곡)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북 고령과 경남 거창일대에서 의병 15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이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8월26일 의병20여명과 함께 경북 고령군 서북방 약35리 지점인 명곡(明谷)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휘하의병 15명이 전사했다. 이날 박인시 의병장은 체포되어 총살됐다.

    <봉화>

    ▲김성칠(金成七~1907 12 19·경북 봉화군 황엽령)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이후 1907년부터 경상북도 봉화군일대에서 채모(蔡某)의병장과 함께 의병2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결사 항전했다.

    그러던 중 1907년 12월9일 일본군 수비대와 황엽령(黃葉領) 백산 서방에서 교전을 벌이다 채의병장을 비롯한 의병31명이 전사하고 김성칠은 체포되어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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