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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4.03.29 06:22
[영상]꿈을이루는사람들 108사암순례단 제4차 순천 송광사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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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꿈을이루는사람들 108사암순례단 제4차 순천 송광사를 가다.

[구미뉴스]=가을 바람이 선선하다. 걷기 좋은 날씨에 가을 정취 속의 은은한 풍경들을 눈에 담을 수 있는 비경이 있다.

 

꿈을이루는사람들 108사암순례단(단장 최선호)은 10월 9일(일) 오전 7시 구미시를 출발하여 제4차 순천 송광사 순례길에 올랐다.

 

지난달 제3차 해인사에 이어 제4차 순천 송광사 순례길에 오른 순례단원들은 두 대의 차량에 나눠 타고,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의 하나로 승보사찰(僧寶寺刹)을 향했다.

 

승보사찰(僧寶寺刹)송광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이다. 대길상사(大吉祥寺)·수선사(修禪社)라고도 하며,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의 하나로 승보사찰(僧寶寺刹:훌륭한 스님을 가장 많이 배출함으로서 얻어진 이름)로서 매우 유서깊은 절이다.

 

‘송광(松廣)’이라는 절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松廣山)에서 비롯된 것으로, 송광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이 있다.

 

먼저, 구전(口傳)해 내려오는 전설에는 이 산이 장차 ‘십팔공(十八公)이 배출되어 불법(佛法)을 널리[廣] 펼 훌륭한 장소’이기 때문에 송광이라 하였다고 한다. 소나무 ‘송(松)’자를 ‘십팔공(十八(木)+公)’이라고 파자(破字)하고 ‘광(廣)’자를 불법광포(佛法廣布)의 뜻으로 해석한 데서 유래한다.

 

또 다른 전설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이 절터를 잡을 때 나복산(羅逗山:현재의 母后山)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木鴟]를 날렸더니 국사전(國師殿)의 뒷등에 떨어져 앉았으므로 이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鴟落臺)라고 불렀다 한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 하여 최남선(崔南善)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鴟의 방언)라고 풀었다.

 

끝으로, 김영수(金映遂)는 이 산에 ‘솔갱이(松의 방언)’가 가득 차 있었으므로 지방사람들이 이 산을 예로부터 ‘솔메’라고 해 왔으며, 그래서 송광산이란 이름이 생긴 것으로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송광의 ‘광(廣)’은 원래 언덕을 의미하는 ‘강(崗)’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승려 임석진(林錫珍)도『송광사사지』를 저술하면서, 김영수의 해석을 가장 타당하다고 보았다. 산에 소나무를 많이 심어 바위가 드러나지 않게 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송광사의 창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송광사사적비(松廣寺事蹟碑)」와 「보조국사비명(普照國師碑銘)」 및 『승평속지(昇平續誌)』 등을 보면, 신라 말기에 체징(體澄)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며, 그 당시에는 길상사(吉祥寺)라고 불렀고, 승려 수는 30명 내지 40명을 넘지 못하는 규모의 절이었다.

 

그 뒤 고려 인종 때의 석조(釋照)가 중창하려는 원(願)을 세우고 역부(役夫)를 소집하고 임목(林木)을 준비하였으나, 완공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얼마 동안 길상사는 거의 폐허화되었다.

 

50여 년을 지난 뒤 보조국사가 이곳으로 정혜사(定慧社)를 옮겨와 새 규모의 사찰로 발전하였다. 보조국사가 송광사를 대수도도량으로 만들 수 있었던 연원은 1182년(명종 12) 개성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하여 수행결사(修行結社)를 약속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법회에 참석하였던 승려들에게 도를 닦을 것을 간곡히 권유하여,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맹문(盟文)을 지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맺을 것을 기약하였다.

 

그 뒤 10년이 지나, 정혜결사를 약속하였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인 득재(得才)가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 머물면서 1188년 봄에 결사를 기약하였던 지기(知己)들을 모은 뒤 보조국사를 청하였다. 그 뒤 1197년에 보조국사는 결사의 동지들과 함께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 들어가 3년 동안을 정진하다가 송광산 길상사로 옮겨와 자리를 잡았다.

 

이때부터 조선 초기까지를 조계산 수선사시대(修禪社時代)라 부르는데, 이는 즉위하기 전부터 보조국사를 존경하였던 희종(熙宗)이 송광산 길상사의 이름을 고쳐 조계산 수선사로 하도록 친히 글을 써서 제방(題榜)을 내렸기 때문이다. 1210년 보조국사가 입적하자 그의 고제자 혜심(慧諶)은 왕명에 의하여 조계산 수선사의 제2세주가 되었다.

 

그때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180여년 동안 15명의 국사가 이곳을 중심으로 수선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나라 선종을 이끌어왔으며, 이와 같은 탁월한 후계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송광사는 승보사찰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된 직후, 송광사 16번째의 국사에 해당하는 고봉화상(高峰和尙)이 이곳에 왔을 때에는 상당히 황폐한 상황에 있었다. 고봉은 1395년(태조 4) 불(佛)·법(法)·승(僧)의 전당(殿堂)을 중건하였고, 1399년(정종 1) 왕은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도록 윤지(綸旨)를 내렸다. 1420년(세종 2)에는 고봉의 뒤를 이어 중인(中印)이 당우도 증축하였고, 절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정종 때에 설립되었던 수륙사를 철폐하고 선종(禪宗)으로 복귀시키는 행정적인 절차도 밟았다.

 

그 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수각(水閣)·임경당(臨鏡堂)·보조암(普照庵)·천자암(天子庵) 등이 소실되었을 뿐 아니라, 왜군의 노략질을 견디다 못한 승려들이 다른 사찰로 옮겨가거나 속가로 되돌아감에 따라 한때 폐사가 되다시피하였다. 이에 응선(應善)은 1601년(선조 34) 수각을 1604년과 1606년·1608년에 천자암과 보조암·임경당을 차례로 중건한 뒤 당시 지리산에 있던 부휴(浮休)를 모셨다.

 

부휴는 1609년 제자 400여 명을 거느리고 이곳으로 옮겨와 조전(祖殿)과 동행랑(東行廊), 천왕문 등을 새로 짓고 기타 건물을 보수하였다. 그 뒤 600여 명의 송광사 승려들이 부휴를 모시고 동안거(冬安居)를 성대히 보냄으로써 근세에 이르는 송광사의 명맥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1842년(헌종 8) 3월 2일 낙하당(落霞堂)에서 일어난 화재로 대웅전을 비롯하여 불우(佛宇) 5개 소, 승료(僧寮) 8옥(屋), 공사(公舍) 12곳 등 2,152칸이 소실되었으며, 유물로는 대웅전의 삼존상(三尊像)·경판 및 외향각(外香閣)의 유조(柚槽:감탕나무로 만든 구유), 창고에 있던 모든 소장품이 소실되었다. 이듬해 기봉(奇峰)과 용운(龍雲)은 대웅전·명부전·응향각(凝香閣)·법왕문(法王門) 등을 차례로 중건하였다. 그런데 1856년(철종 7)까지 중창에 소요된 기간은 14년이었으며, 경비와 총액은 1만 1,290냥(兩)에 달하였다.

 

그 뒤 율암(栗庵)은 관의 협력을 얻어 1923년에서 1928년 사이에 용화당(龍華堂) 등 9채를 중수하였고 명성각(明星閣) 등 7채를 중건하였으며, 사감고(寺監庫)·장탄문(墻坦門)을 신축, 종각을 증축하였다.

 

1948년 1월 여수반란사건과 6·25전쟁으로 조계산 일대에 무장공비들이 잠입하자, 공비 토벌을 위하여 국군은 작전상 절 주변의 나무를 벌채하였다. 이에 공비들은 절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키다가 1951년 5월 대웅전 등 절의 중심부를 불태웠다.

 

1955년에서 1963년 사이에 취봉(翠峯)과 금당(錦堂)은 불탄 건물을 다시 창건 또는 중창하였다.

 

1970년대에는 조실인 구산(九山)이 설법전·수선사·화엄전 등을 보수하였고 조계총림(曹溪叢林)으로 부활하여 수선사의 전통을 되살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983년부터 1990년에 이르기까지 주지 현호(玄虎)가 대웅보전·지장전·승보전(僧寶殿) 등 크고 작은 건물 20여 동을 새로 세우거나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불일암]

감로암을 감고 돌아 왼쪽 길로 300m쯤 올라가면 고개 위에 갈림길이 나타난다. 직진하여 산 허리를 타고 500m정도 나아가면 제7세 자정국사(慈靜一印, 수선사 주 1293~1301)께서 창건하여 얼마 전까지 자정암(慈靜庵)이라 불렀던 불일암에 도달한다.

 

1708년 시습(時習)·이징(以澄)스님이 증수한 것을 시작으로, 1765년에 탁명(卓明)스님이 창건한 공루는 1929년 해체되었고, 1866년 승허(乘虛)스님이 창건한 칠성각(七星閣)은 이듬해 의잠(宜岑)스님이 단청했다, 1891년에는 월화(月和)·계암(桂庵)·용선(龍船)스님이 정문을 중수하고. 1917년 설월(雪月龍燮 1868~1938)스님의 중수, 192l년 서월(瑞月奇文)스님의 서익실(西翼室)중건과 설월스님의 뒷방 수선 이후 6·25로 퇴락되었다가 1975년 법정(法頂)스님이 중건하면서「불일암」편액을 걸었고 1996년 본채 상부를 해체 중수했다. 1986년에 신축한 해우소도 1997년 해체 복원되었다 (감원 德祖). 지금의 본채 자리에는 칠성각이 있었고. 옛날 본채는 밭과 요사채 자리에 있었다.

 

주석했던 스님들의 면모를 보면 1845년부터 1853년까지는 기봉(奇峰藏旿 1776~1853)스님·1860년대의 연봉(蓮峰鳳麟 1833~1912)스님·1877년 경해(鏡海官一 1843~1928)스님 1879년 통허(洞虛致性1844~1901)스님· 1886년부터 다음 해까지 원해 (圖海鳳玉1850 ~1888)스님·1922년부터 1927년까지 경명(景溟泰敏 1858 ~?)스님·1925년 계암(桂庵應寬)스님. 1926년 연해(蓮海)스님·1929년 호붕스님을 찾을 수 있다.

 

1879년 열었던 만일회(萬日會)는 1882년 큰 절의 보제당(普濟堂)으로 옮겼다.

1835년에 본사 선원 구역인 상대의 칠전(七殿)에서 조성하여 봉안했던 후불탱화(금어 益贊)는 부도전에 이안되었다가 1995년 박물관으로 옮겼으며, 1867년에 그린 칠성탱화(금어 龍院奇衍 就善 妙英) 3폭은 본사 관음전에 이안된 후 역시 박물관으로 옮겼으며, 1879년의 지장탱화(금어 雲波就善·天禧·敏禹)도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경내 북동쪽에 자정국사 부도가 있다.

뒷산 망수봉(望水峰·望需峰·望守峰·望峰)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는 맛은 호령봉(號令峰)과 짝하리라.

[부도암]

부도는 스님의 사리탑을 말한다.

효봉영각 옆 대나무 숲으로 300m 쯤 올라가면 율원(律院)으로 사용중인 부도암이 있다. 건물 편액은 부도전(浮屠殿)이며, 비전(碑殿)이라고도 한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29기의 부도와 5기의 비(碑)가 있기 때문이다.

임진·정유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때 큰 피해를 입은 뒤 폐허 속에서 1640년에 영산전(보물 303호)과 약사전(보물 302호)을 중건하는 등 큰 절의 복원에 힘을 기울이다가 1678년에 이르러 백암(柏庵性聰 1631-1700)스님의 원력으로 깨어진 비를 다시 새겨 16국사의 사적을 온전하게 전하니 곧 제1세 보조국사비(지방문화재 91호)와 송광사 사적비이다.

백암스님은 이 해에 이미 이곳에 건립되어 있던 부휴(浮休善修 I543~ 1615) ·벽암(碧巖覺性 1575~ 1660)·송계(松溪性玄 1640년 주지)·뇌정(雷靜應?)·취미(翠微守初 I590~1668) 유영(柳影圖哲)스님의 부도를 아울러 수호할 암자를 창건토록 제자인 설명(雪明)스님에게 명하니 1689년에 완성하였다.

1776년 와월(臥月敎萍1750~1822)스님이 개강하고 묵암(?庵最訥1717~1790)·향운(香雲昌昊1893~1936)스님이 주석하였으며 1942년 석두(石頭寶澤 1882~1954)스님이 중수하였다.

1828년에 은적암에서 조성하여 부도전에 봉안한 신중탱화(금어 度鎰·壯愈)는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백암·묵암스님의 비와 용운(龍雲處益 1813~1888)스님의 공덕비, 그리고 백암·무용(無用秀演 1651~ 1719)·영해(影海若坦 1668~1754)·풍암(楓巖世察 1688~1767)·묵암스님을 비롯하여 근래의 계룡(溪龍奎成 1913~1995)스님에 이르기까지 여러 스님의 부도가 계보에 따라 여법하게 배열되어있다.

잠깐 보조국사비와 사적비의 음기를 가만히 살펴보라. 1678년 당시의 시주자 중에는 다음과 같은 생소한 글자와 부르는 대로 부담없이 쓴 이름들이 있다.

李 金(이끗쇠)·姜氏 介·裵 金·李氏莫今(이씨막금)·鄭氏愛介(정씨애개!) ·趙¿g達(조작달)·趙介同(조개동)·金 同(김솔동)·車玉乭屎(차옥돌시)·宣淡沙里(선담사리) 德今伊(덕금이).

송광사 순례길에서 코는 숲의 향기를 맡고, 눈은 한들거리는 나뭇잎을 따라가고, 귀는 바람의 속삭임을 들으며, 입은 향긋한 초록을 베어 문다.

숲은 인간에게 힘을 주는 곳이다. 가슴이 뻥 뚫리게 하는 곳이다. 흐르는 물소리와 새소리를 들으며 걷는 숲에서 사람들은 숲과 하나가 되어 오감이 즐거운 숲길의 자연과 하나가 되어 걷는다.

 

“소리를 내고자 소리를 낸다면 또한 어찌 울림이 있을까?”

덜어내고 비워내고 씻어내면 저절로 안에서 밖으로 흘러나오는 소리가 바로 ‘비움의 울림’이 될 것이다.

 

어찌 밖에서 안으로 채운들 그 소리가 날까. 안에서 밖으로 흘러 넘쳐나는 소리가 울림일 게다. 이 가을에는 높고 푸른 하늘에 흐르는 말간 바람 소리를 듣고 싶다. 이렇듯 곱고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 퍼지는 ‘비움의 미학’에서 또 하나의 깨달음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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